2004년 4월 국내 첫 고속차량 KTX가 개통되어 올해로 개통 20주년을 맞이했다. 프랑스의 TGV를 한국 철도환경에 맞게 개량한 KTX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동시간을 2시간대로 단축하며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바꾸어놓았다. 진정한 한국형(국산) 고속차량 시대는 그로부터 4년 뒤에 열렸다. 2008년 현대로템이 순수 국내 기술로 설계하고 제작한 동력집중식 고속차량 KTX-산천의 첫 등장으로 한국은 일본, 프랑스, 독일에 이어 세계 4번째 고속차량 제작 기술 보유국이 되었다.
현대로템은 이후 꾸준한 연구개발을 통해 2012년 430km/h급 성능을 목표로 한 HEMU-430X를 선보이며 동력분산식 고속차량 기술 기반을 확보했다. 동력분산식 고속차량은 열차 칸마다 동력과 제동장치가 분산 배치되어 있어 가속과 감속이 자유롭고 최고속도에 도달하는 시간이 짧다는 장점을 지녀 글로벌 철도시장에서 그 수요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HEMU-430X는 이듬해 최고속도 421.4km/h를 달성하며 현대로템이 세계적 수준의 동력분산형 고속차량 제작 기술력을 갖추었음을 입증했다.
HEMU-430X의 개발로 축적한 동력분산식 고속차량 설계 노하우는 2021년 1월부터 영업운행을 시작한 KTX-이음(EMU-260)과 2024년 5월 영업운행에 들어간 KTX-청룡(EMU-320)으로 빛을 발했다. KTX-이음은 국내 기술로 설계∙제작된 한국 최초의 동력분산식 고속차량으로, 6칸 모두를 객차로 활용해 381석의 좌석을 갖추고 최고 영업속도 260km/h로 운행된다.
2024년 5월부터 운행을 시작한 KTX-청룡은 한발 더 나아가 설계 최고속도 352km/h, 최고 영업속도 320km/h의 성능을 내는 차세대 동력분산식 고속차량이다. 8량 1편성을 기본으로 515석의 좌석을 갖춰 KTX-이음 대비 수송효율이 약 35% 높다. 복합(중련) 열차로 운행할 경우 좌석수는 1030석으로 늘어난다.
현대로템은 KTX-청룡의 영업운행 개시에 이어 2024년 6월에는 국산 고속차량 사상 처음으로 해외시장 진출에도 성공했다. 한국철도공사(코레일)와 민관합동으로 우즈베키스탄 철도청(UTY, Uzbekistan Temir Yo’llari)이 발주한 2700억원 규모의 동력분산식 고속차량 공급 및 유지보수 사업을 수주한 것이다. 현대로템은 KTX-이음과 유사한 250km/h급 동력분산식 차량 6편성(7량/편성)을 공급하기로 했으며 광궤용 대차, 현지 전력과 호환되는 동력장치 등 우즈베키스탄 철도 환경에 최적화된 맞춤 설계도 진행할 계획이다. 이 수주는 향후 국산 고속차량의 본격적인 해외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국산 고속차량 최초의 해외시장 진출에 이어 2024년 9월 유럽에서 또 하나의 희소식이 들려왔다. 국내 유일의 고속차량 제작사인 현대로템이 유럽 TSI의 설계 부문 인증(ISV)을 획득했다는 소식이다. TSI는 유럽 내 철도 운영호환성을 위한 기술표준으로 유럽 권역 내에서 철도사업을 수주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하는 자격증과 같다. 이번 TSI 기술인증 획득은 20년간 한국형 고속차량 국산화 및 선진화를 위해 매진해온 현대로템의 열정이 빚어낸 쾌거이자, 유럽 철도시장 진출을 본격화하는 출사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TSI 인증, 유럽 철도시장으로 향하는 길
유럽 철도망은 국가별로 레일 간격, 신호, 전력, 운영방식, 안전관리 등 철도 환경이 상이해 열차가 국경을 넘어 운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다. 유럽권역 내에서 철도의 운영호환성을 확보하기 위한 법령과 기술기준이 본격적으로 제정된 것은 EU(유럽연합)이 출범한 1994년 이후였다. EU는 1996년 고속철도시스템의 상호운영지침을 발표하고, 2008년 유럽철도국(ERA)을 통해 유럽 내 철도 운영호환성 기술기준인 ‘TSI(Technical Specification for Interoperability)’를 제정했다. 최초 TSI는 고속철도와 일반철도로 구분되어 있었지만, 2014년 개정 이후 현재는 고속철도와 일반철도를 구분하지 않는다.
TSI 인증은 크게 ‘설계 부문(SB 모듈)’과 ‘품질 부문(SD 모듈)’ 인증으로 구분된다. 설계 부문은 철도차량의 성능이나 주요장치에 대한 설계에 문제가 없는지 검증하는 과정으로 국내의 ‘형식승인’ 제도와 흡사하다. 해당 고속차량의 부품이나 주요장치 설계 기술이 유럽의 형식승인 기준에 부합하는지 검증하기 때문에 ISV(Intermediate Statement of Verification, 중간검증서)라고도 불린다. ‘품질 부문’ 인증은 제작사의 고속차량 양산 제품이 기존에 인증받은 ‘설계 부문’ 기술을 그대로 반영해 제작되었는지 여부와 생산단계에서 품질관리시스템(QMS)를 기반으로 차량이 제작/검사되는지를 판단한다. 단순 시제품이 아닌 양산 차량의 제작능력을 갖춰 최종적으로 납품에 문제가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TSI 규격 준수를 위한 차량 설계에는 통상 2년 이상 소요되기 때문에 TSI 설계 인증을 획득하지 못한 제작사가 유럽에서 철도사업을 수주하더라도 차량 납기를 맞추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최근에는 비유럽권 국가에서도 유럽권과의 철도 연결을 고려해 TSI 기술 표준을 철도차량 제작사에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추세로, TSI 인증은 글로벌 고속차량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필수 ‘자격증’으로 작용하고 있다.
TSI 준수 여부를 평가하고 확인해 인증서를 발급하는 역할은 ERA가 지정한 공인 인증기관(NoBo, Notified Body)에 부여되어 있다. 공인 인증기관은 설계, 생산 단계와 납품까지의 전 과정에 대해 검증하며 차량이 운용될 철도시스템과의 인터페이스에 대해서도 검증한다. TSI 인증을 획득하면 유럽철도망 내에서 국가간 상호운영이 허용된다.
평가 기준은 EU 내 국경을 넘어 운영되는 철도차량, 신호, 인프라, 전력, 운영에 관한 필수 요구조건에 기반한다. TSI는 이를 ‘안전성(Safety)’, ‘신뢰성 및 가용성(Reliability and Availability)’, ‘건강(Health)’, ‘환경(Environmental Protection)’, ‘기술적 호환성(Technical Compatibility)’, ‘운영 및 유지보수(Operation and Maintenance)’ 등 6개 분야로 정의하고 모든 회원국이 이를 준수하도록 의무화했다.
위의 6가지 필수 요구조건에 바탕을 둔 차량부문에서의 TSI 인증은 7개 세부 평가분야를 둔다. ▲LOC&PAS(Locomotive & Passenger, 기관차 & 승객수송차량 기술 요구사항), ▲PRM(Persons with Reduced Mobility, 장애인 및 승객에 대한 편의 요구사항), ▲NOI(Noise, 소음 요구사항), ▲SRT(Safety in Railway Tunnels, 터널 내 안전사고 대응, 조치 요구사항), ▲ENE(Energy, 변전설비와 차량가선간 인터페이스 요구사항), ▲INF(Infrastructure, 플랫폼(정거장)과 차량간 인터페이스 요구사항), ▲CCS(Control Command & Signaling, 차상/지상 신호장치 요구사항)가 바로 그것이다.
TSI 기술인증 획득을 향한 현대로템의 여정
현대로템은 국내 유일의 고속차량 제작사로서 동력집중식 고속차량(KTX-산천)에 이어 동력분산식 고속차량(KTX-이음, KTX-청룡)까지 해외 철도시장 트렌드에 부합하는 고속차량을 지속적으로 개발 하고 제작해왔다. 하지만 국내 고속차량 철도안전법 기술기준에 맞춰 설계 및 제작이 이루어져 수출을 고려한 국제표준이나 TSI 요구조건에 대해서는 다소 미흡한 것이 현실이었고, 한국산 고속차량의 글로벌시장 진출을 위해서는 TSI 인증을 반드시 획득해야 한다는 주문이 제기되어 왔다.
TSI 인증 획득은 한국에서 운행하는 고속차량을 유럽 기준에 부합하도록 설계단계에서부터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하는 큰 프로젝트였다. 실제로 현대로템의 고속차량은 이미 다수의 국제표준 기술을 적용해 설계했음에도 불구하고 TSI 인증 요구조건의 80%가량을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현대로템은 고속차량의 해외수출 기반 마련을 위해 지난 2021년 EMU-320을 바탕으로 하는 TSI 인증 준비 태스크포스를 출범했다. 우선 목표는 TSI 설계 부문(SB 모듈) 인증이었고, ▲철도차량(LOC&PAC), ▲장애인 및 노약자(PRM), ▲소음(NOI), ▲터널 안전(SRT)의 4가지 항목을 만족하기 위한 대대적인 재설계에 착수했다.
TSI 인증의 4가지 세부평가항목은 무려 1,184개에 이르지만 EMU-320의 기존 설계는 겨우 20%만 TSI 기준에 부합하는 상황이었다. 단적인 예로 차폭은 국내 기준이 3150mm인 반면 유럽 기준은 2850mm로 300mm나 작았다. 차량의 크기만 달라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작은 부품부터 객실, 심지어 화장실 크기까지 모두 유럽 기준으로 완전히 새로운 규격의 차량을 만들어내야 했다.
현대로템은 EMU-320을 유럽형 고속차량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630종의 도면과 209종의 기술문서를 새로 작성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의 TSI 인증기관 평가자와 수차례 대면평가를 통해 기술 설명을 진행하며 인증 기준 설계의 완성도를 높여갔다.
그리고 마침내, 현대로템은 2024년 9월 24일 독일의 TSI 인증기관인 TÜV 라인란트(TÜV Reinland)를 통해 동력분산식 고속차량인 EMU-320에 대한 TSI 설계 부문(SB 모듈) 인증 획득에 성공했다. TSI 인증 준비에 착수한지 3년여, 평가를 받기 시작한 2023년 3월로부터는 채 2년이 안 되는 19개월만에 이룬 성과였다.
향후 계획 및 기대 효과
ISV 인증에 성공한 현대로템은 이후 설계 부문 인증 범위 밖의 TSI 요구사항에 대한 보완 설계를 진행해갈 계획이다. 차상/지상 신호장치와의 인터페이스 규격을 살피는 CCS(Control Command & Signaling), 변전 설비와 차량간 인터페이스에 관한 ENE(Energy), 플랫폼(정거장)과 차량간 인터페이스 규격인 INF(Infrastructure) 등 ISV 인증 과정에서 주요과제로 다루지 않았던 TSI 평가의 나머지 세부항목들이다. 이중 CCS의 경우 별도 TSI 인증을 진행 중이며 2027년 12월 완료 예정이다.
이 같은 설계역량 강화는 추후 TSI 인증을 요구하는 글로벌 고속차량 공급사업의 입찰과 연계해 이루어질 예정이다. 수주 후 제안 차량을 기반으로 ENE(전력) 및 INF(플랫폼) 항목에 대한 사전평가를 선제적으로 수행할 예정이다.
TSI 인증 조건 이외의 요구사항에 대한 보완 설계도 병행될 예정이다. 변전설비와 차량간 고조파(harmonics) 영향성 시뮬레이션 해석, 국제표준(UIC-612)에 만족하는 운전실 데스크 설계, 공기역학 및 축소된 차폭을 고려한 고속차량 전두부 재설계 등이 대표적이다.
이번 설계 부문(ISV) 인증서 획득으로 유럽시장, 더 나아가서 글로벌 고속차량 시장 진출의 발판이 마련되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ISV 인증은 TSI 기술표준을 요구하는 유럽시장 진출의 사실상 ‘출입증’인 동시에 수주 이후에 사업진행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증명서’와 다름없다. 최근 유럽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 UAE등 중동을 중심으로 튀르키예, 이집트 등 비유럽 국가도 고속차량에 대한 TSI 인증 여부를 입찰 평가에 반영하는 등 TSI 기술표준은 점차 글로벌 고속차량 시장의 필수 요구사항이 되고 있다.
게다가 향후 고속철도 수요가 늘어날 동남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도 TSI 인증서가 입찰 참여 요건 중 하나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업계의 예상이다. 이 같은 글로벌 철도시장의 흐름을 고려하면 이번 ISV 인증서 획득은 무역장벽을 해소하는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설계 역량에 있어서도 해외 철도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높이는 기폭제로 작용할 전망이다. 상호호환성을 고려한 설계 역량 및 검증 능력의 향상, 차량 통합 인터페이스의 설계 역량 향상, TSI 기술표준 만족을 통한 국제규격 이해도의 향상 등 TSI 인증 획득 과정을 통해 전반적인 철도차량 기술력의 향상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TSI 기술표준에 따라 주요 시스템의 설계가 변경되면 관련된 부품 역시 인터페이스 등의 설계 변경이 불가피하다. 현대로템은 우선 제동시스템, 연결기, 라이트 등 상호호환성을 확보해야 하는 15개 부품에 대한 TSI IC(Interoperability Constituent) 인증을 별도 진행할 계획으로, 15개 IC 품목 협력사와 협업해 국산화를 추진하는 과정을 통해 국내 철도차량 부품업계의 기술력이 동반 성장하고 산업생태계가 선진화 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글로벌 고속차량 시장은 유럽 및 중국에 기반한 소수 기업이 시장을 지배하는 경향이 강했고, 독자적인 기술장벽 때문에 역외권 차량 제작사는 아무리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어도 시장에 진입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현대로템은 이번 TSI 기술인증 획득으로 고속차량의 본격적인 해외시장 진출의 기반을 마련했다. 국제규격에 대한 이해도 향상, 차량 설계 역량 및 차량 통합 인터페이스 설계 역량의 강화, 국내 공급업체의 경쟁력 증진 등 TSI 인증에 따른 부대 효과도 큰 소득이다.
향후 국내 고속차량의 해외 수출 경쟁력 향상을 위해 현재 국토교통부 주관 하에 국내 철도차량 기술기준을 유럽 TSI 수준에 부합하도록 개정하여, 기술 및 안전수준을 유럽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개정안 재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국내용 철도차량에도 유럽과 동일한 수준의 부품과 구성품을 적용하고 입증문서를 작성하여 국내 고속차량의 수출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목표이다. 현재 단기(~24년) 130개의 기술기준 개정을 시작으로 중기 100개, 장기 130개의 기술기준을 개정하여 TSI 와 국내 기술기준과 부합화율을 80%까지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지난 20년간 고속차량 국산화 개발에 매진해온 현대로템이 고속차량 제작 및 수출을 통해 전세계로 뻗어나갈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