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EW NORMAL

미국 HRSEA가 그리는 북미 철도 기술 독립의 지도

오늘날 글로벌 철도 산업은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과거 철도가 단순히 승객과 화물을 실어 나르는 ‘기계적 운송 수단’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AI 기반의 자동 운행, 실시간 데이터 분석을 통한 예방 정비,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한 친환경 구동 시스템이 결합된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으로 진화하고 있다.

1880년대 미국의 철도를 입체 지형으로 표현한 노선도. 출처 : muir-way.com

글로벌 철도 시장의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전통적인 유럽의 강자들과 급부상하는 신흥 제조사들이 북미와 유럽 등 핵심 시장에서 점유율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격랑 속에서 현대로템은 철도차량 제작사를 넘어 글로벌 철도기술 리더로서 입지를 굳히기 위해 ‘핵심 기술의 현지화’라는 정공법을 택했다. 지난 2025년 9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에서 준공식을 가진 미국 전동차 전장품 생산 거점인 ‘현대로템 스마트 일렉트릭 아메리카(HRSEA, Hyundai Rotem Smart Electric America)’는 바로 그 전략적 결단이 낳은 산물이다.

‘현대로템 스마트 일렉트릭 아메리카(Hyundai Rotem Smart Electric America, HRSEA)’는 현대로템이 핵심 부품 공급사로서의 독자적인 경쟁력을 북미 현지에서 공고히 다졌음을 알리는 ‘기술 독립’의 상징이자 글로벌 전진기지다.

약 8,500㎡ 부지에 들어서는 이 공장은 단순한 부품 조립 라인을 넘어선다. 현대로템이 수십 년간 축적해온 추진제어 및 에너지 관리 기술(철도차량 핵심 전장품 기술)을 북미 본토에서 직접 구현하고, 설계부터 제조, 시험, 사후 관리까지 일원화된 체계를 구축하는 ‘기술 독립’의 상징이자 글로벌 전진기지다.

그동안 북미 철도 시장에 진출한 국내외 기업들은 차량은 직접 제작하되, 철도차량의 심장에 해당하는 전장품은 글로벌 부품 제작사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외부 협력사의 사정에 따른 공급망 리스크, 원가 상승, 그리고 현지 운영사의 유지보수 요구에 즉각 대응하지 못하는 고질적인 한계가 있었다. HRSEA 설립은 이러한 외부 의존 구조를 끊어내고, 현대로템이 차량 제작 역량을 넘어 핵심 부품 공급사(Tier 1)로서의 독자적인 경쟁력을 북미 현지에서 공고히 다졌음을 알리는 계기이다.

지난 2025년 9월, 현대로템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에서 HRSEA 전장품 공장 준공식을 갖고 북미 시장 공략을 본격화했다. 사진 중앙은 이용배 현대로템 대표이사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의 파고를 넘는 현지화의 정수

미국 철도 시장은 거대한 규모만큼이나 까다로운 진입 장벽으로 유명하다. 세계 최대 규모의 철도 네트워크를 보유한 미국은 메이저 철도 시장으로 불리는 유럽과 비교했을 때 확연히 다른 특성을 지닌다. 표준화된 규격과 국가간 연결성을 중시하는 유럽 시장이 정교한 인터페이스와 효율성에 집중한다면, 북미 시장은 광활한 대륙을 가로지르는 극한의 내구성과 거대한 화물 하중을 견디는 견고함, 그리고 무엇보다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한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라는 강력한 보호무역 정책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운다.

캘리포니아주 사막의 철로. 미국은 약 25만~29만km로 추산되는 전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 선로를 보유하고 있으며, 거대한 철도 네트워크에서 운행을 견디는 내구성과 견고함이 요구된다.

특히 연방정부의 자금이 투입되는 철도 인프라 프로젝트에서 자국산 부품 사용을 강력히 요구하는 바이 아메리카 정책은 글로벌 기업들에게 단순한 규제를 넘어 생존을 건 전략적 선택을 강요한다. 현대로템은 HRSEA를 통해 이 장벽을 ‘공격의 기회’로 바꾸었다.

현지에서 추진제어장치와 견인전동기 등 핵심 장치를 직접 생산하는 체제를 갖춤으로써 규제 대응력을 극대화하는 것은 물론, 현지 고객사인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교통국(LACMTA)과의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좁혔다. 이는 단순히 부품을 납품하는 관계를 넘어, 고객의 어떠한 요구사항에도 실시간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기술 파트너십을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사실 현대로템의 이런 결단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현대로템은 지난 2006년 캘리포니아 2층 객차 사업을 시작으로 플로리다, 필라델피아, 보스턴, 덴버 등 미국 전역의 주요 거점 도시에서 꾸준히 공급 실적을 쌓으며 약 20년간 북미 철도 인프라의 현대화를 함께해왔다. 특히 2024년 LA메트로 전동차 사업 수주는 현대로템이 그동안 쌓아온 신뢰의 결실이었다.

현대로템이 미국 메사추세츠주 교통공사(MBTA)에 납품해 보스턴에서 운행 중인 2층 객차. 2008년 최초 납품 이후 2019년, 2024년까지 총 3차례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해 독자 생존이 아닌 ‘공생 모델’을 제시했다는 사실이다. 현대로템은 국내 강소기업들과 손잡고 북미 시장에 동반 진출한다. 이는 대한민국의 철도 부품 생태계 전체가 북미 시장이라는 거대한 대지에 뿌리를 내리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현지 생산 라인은 한국의 숙련된 제조 DNA를 미국 현지 인력에게 이식하는 거대한 기술 전수의 현장이 된다. 현지인 고용 창출과 체계적인 기술 교육을 통해 리버사이드 지역 사회의 경제적 활력을 불어넣는 동시에, 현지에서 생산된 제품이 다시 미국의 인프라를 혁신하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교한 현지화 전략은 현대로템이 단순한 ‘외국 기업’이 아닌, 북미 철도 산업의 ‘로컬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토대가 된다.

장벽을 기회로 바꾸는 ‘정공법’ : 모듈화 및 경량화 설계

현대로템이 지난 2024년 수주한 LA메트로 전동차 조감도. 납품규모 182량에 이르는 HR5000 프로젝트는 미국 HRSEA 현지공장 설립의 기폭제가 되었다.

HRSEA를 설명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이정표는 바로 ‘LA 메트로 HR5000 프로젝트’다. 지난 2024년, 현대로템 미국법인(Hyundai Rotem USA Corporation)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교통국(LACMTA)이 발주한 약 8688억원 규모의 전동차 공급 사업을 수주했다. 182량에 달하는 이 대규모 프로젝트는 1993년부터 운용된 현지의 노후 전동차를 교체하는 동시에, 2028년 LA 올림픽과 패럴림픽이라는 국가적 행사를 앞두고 이동 수요를 책임지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다.

LA메트로 발주처인 LACMTA는 제작사 선정 과정에서 단순히 가격이 아닌 납기 지연이나 저품질 납품 사례를 방지하기 위한 사업 수행 능력과 실적, 기술력을 최우선 가치로 평가했다. 현대로템은 과거 캐나다 밴쿠버 무인 전동차 사업 등에서 보여준 조기 납품 실적과 철저한 품질 관리 능력을 인정받아 쟁쟁한 글로벌 경쟁사들을 제치고 최종 낙찰자로 선정되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에 위치한 HRSEA 전장품 공장 외부 전경. HR5000 프로젝트를 위한 핵심 전장품 생산과 함께 현대로템 미국 철도사업의 전진기지로 기능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 대규모 프로젝트는 단순히 차량을 공급하는 계약을 넘어, 현대로템이 미국 현지에 전장품 생산 기지(HRSEA)를 구축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HRSEA는 HR5000 프로젝트에 탑재될 핵심 전장품 4종(추진제어장치, 견인전동기, 보조전원장치 및 HV BOX)을 전담 생산하며, 프로젝트의 성공을 이끄는 기술적 중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최열준 전장시스템개발센터장은 핵심 전장품 4종의 현지 생산 효율과 조립 편리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모듈화’에 역량을 집중했다.

HR5000 프로젝트에서 핵심 전장품의 현지 생산을 진두지휘한 최열준 전장시스템개발센터장은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전장품들은 현대로템이 해외 공장에서 최초로 생산하는 부품인 만큼, 생산 효율과 조립 편리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모듈화(Modularization)’에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각 구성품의 모듈화는 단순히 생산 공정을 단순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제품 전체의 경량화를 실현하는 핵심 동력이 됩니다.”

이는 북미 철도 시장의 가장 까다로운 장벽인 ‘엄격한 중량 제한’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한 현대로템의 핵심 엔지니어링 전략이다. 먼저 차량의 심장 역할을 하는 ‘추진제어장치(Traction Inverter)’는 설계의 근본적인 혁신을 이뤄냈다. 당초 차량당 2개의 함체(Box)로 제안되었던 구성을 하나의 통합 함체로 재설계한 것이다. 이는 내부 회로의 집적도를 높이고 냉각 효율을 최적화한 결과로, 중량 저감과 원가 경쟁력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

동력의 핵심인 ‘견인전동기(Traction Motor)’는 북미 시장 맞춤형인 ‘측면 취부 방식’을 채택한다. 기존 방식은 점검 시 차체와 대차를 분리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으나, HRSEA의 설계는 대차 분리 없이도 전동기를 탈거할 수 있어 유지보수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HRSEA에서 제작한 추진제어장치(Traction Inverter)를 연구원이 검사하고 있는 모습. 차량 하부에 장착되는 추진제어장치는 전차선에서 받은 전력을 모터 구동에 적합한 전압과 주파수로 변환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보조전원장치’는 축전지 충전기와 인버터를 독립적으로 제어하는 방식을 적용해 가용성을 높였으며, ‘HV BOX(High Voltage Box, 고압함)’는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던 HSCB(High Speed Circuit Breaker, 고속차단기), VICU(Voltage Intensity Control Unit, 전압검지장치), 나이프 스위치(Knife Switch, 칼날형 개폐기), 컨택터(Contactor) 등을 하나의 함체로 통합 설계했다. 이를 통해 설치의 편리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차량 하부 중량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이런 전방위적 경량화 노력은 글로벌 선진 전장품 제작사들과 대등하거나 상회하는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향후 본격적인 양산시 에너지 소비 효율을 최적화하고 북미 시장의 엄격한 기술 표준을 만족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견인전동기(Traction Motor)의 모습. 추진제어장치에서 공급받은 전력을 사용해 바퀴를 회전시키는 직접적인 힘을 만드는 장치다.

한미 기술 협력의 하이브리드 모델로 북미 전역에 퍼지는 ‘현대로템 품질 DNA’

이러한 하드웨어 차원의 설계 혁신은 강력한 소프트웨어 경쟁력과 지능형 생산 시스템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HRSEA의 운영 철학이 단순한 제조를 넘어 ‘스마트’와 ‘품질’이라는 두 단어로 압축되는 이유다. 현대로템은 이 공장에 AI 기반의 품질 관리 시스템과 데이터 분석 툴을 점진적으로 도입하며 스마트 팩토리로의 진화를 꾀하고 있다.

특히 전장품은 하드웨어 만큼이나 이를 제어하는 소프트웨어의 안정성이 핵심인데, HRSEA는 발주처의 까다로운 요구사항인 CMMI(Capability Maturity Model Integration, 통합 능력 성숙도 모델) Level 2 인증을 획득하며 조직의 프로세스 및 소프트웨어 품질 관리 능력을 국제적으로 입증했다. 이는 HRSEA가 단순히 기계적인 부품 조립 단계를 넘어, 고도의 정밀함이 요구되는 임베디드 소프트웨어 제어 능력까지 완벽하게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CMMI 성숙도 단계. HRSEA는 LA메트로의 요구사항인 CMMI 레벨2 인증을 획득했다.

운영 측면에서도 기존 관행을 깬 파격적인 시도가 돋보인다. 현대로템은 미국 철도산업에 정통한 현지인 총괄 책임자를 영입해 생산 프로세스의 현지 최적화를 달성하는 동시에, R&D 분야 주재원들이 실시간으로 기술 지원을 수행하는 밀착 협력 체계를 가동한다. 이러한 하이브리드 운영 모델은 현지 문화와 규제에 유연하게 대응하면서도, 한국 본사의 검증된 품질 균일성을 북미 현지에 그대로 이식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기술 전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고, ‘품질은 타협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라는 현대로템의 신념을 현지 제조 공정 전반에 투영해 나갈 방침이다.

HRSEA에서 검증된 고도화된 설계 방안과 품질 관리 프로세스는 향후 북미 전역의 프로젝트로 수평 전개될 예정이다.

HRSEA에서 검증된 고도화된 설계 방안과 품질 관리 프로세스는 단순히 LA 프로젝트에 머물지 않는다. 이에 관해 최열준 센터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HRSEA에서 축적한 현지 생산 노하우는 향후 뉴욕, 필라델피아 등 동부 지역을 포함한 북미 전역의 프로젝트로 수평 전개할 계획입니다. 현재 진행 중인 뉴욕교통공사(NYCT)의 뉴욕 메트로 전동차 사업 사전 인증(PQ) 참여와 컨설턴트와의 협업 설계는 이러한 확장 전략의 일환입니다. HRSEA는 단순한 생산 거점을 넘어, 북미 시장의 까다로운 규격을 선제적으로 충족하고 리드타임을 단축하는 ‘고객 맞춤형 기술 교두보’로서 현대로템 전장품 사업의 글로벌 위상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엔진이 될 것입니다.”

ESG 경영과 2028년 LA 올림픽을 향한 질주

로스앤젤레스는 2028년 올림픽 및 패럴림픽 대회를 위해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 중이다. 사진은 LA 메트로의 모습. 

HRSEA는 현재 리버사이드 시정부의 승인을 거쳐 공장 지붕에 대규모 태양광 발전 설비를 구축하고 있다. 이 설비는 전장품 생산 과정에서 소비되는 전력의 상당 부분을 신재생 에너지로 대체하여 탄소 중립을 지향하는 글로벌 트렌드에 발맞추는 동시에, 친환경 제조 공정을 요구하는 북미 시장의 향후 입찰에서 강력한 가산점 요소가 될 전망이다.

HRSEA의 지붕에 설치된 태양광 발전 설비의 모습. 이를 통해 HRSEA는 북미 시장의 친환경 제조 공정에 요청에 대응하고 있다.

다가오는 2028년 LA 올림픽과 패럴림픽은 HRSEA에 있어 거대한 기회의 장이다. 대규모 인파 이동을 위한 철도 인프라 확충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현지에서 검증된 전장품을 적기에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은 현대로템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HRSEA는 이제 막 첫걸음을 뗐지만, 그 걸음은 이미 북미 철도 시장의 지형도를 바꾸고 있다. “품질은 타협할 수 없는 가치”라는 이용배 대표이사의 강조처럼, 현대로템은 리버사이드의 뜨거운 햇살 아래서 북미 철도의 미래를 직접 빚어내고 있다. 선로 위의 심장을 현지에서 직접 뛰게 만드는 이 거대한 여정은 현대로템이 글로벌 철도 기술의 리더로 자리매김하는 연대기로 기록될 것이다.